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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들은 대자유 해탈을 위해 구도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이다. [사진=석하스님]
이 세상에서 ‘자유’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 자유롭게 연애하고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돌아다니고 자유롭게 공부하는 자유로운 세상을 꿈꿀 것이다. 이것을 실천하거나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를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하는데,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에게 놀리듯이 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사람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모두가 ‘자유’를 꿈꾸지만, 실제로 이 세상을 살다보면 자유로울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
‘자유’에는 책임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나는 이 원리를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부터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유롭고자 했으나, 그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 책임이라는 것은 일종의 규율, 계율 또는 율법과 같은 것을 통해 실현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나름의 계율의 범주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느정도 이 세상의 보편적 진리와 상응해야 한다.
대학생이 되어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터치없이 처음 느껴보는 ‘자유’가 일단 좋기는 했지만, 이렇게 살다보니 불안감은 커져갔다. 부모님께서 바라시는 훌륭한 사람, 선생님께서 기대하시는 창조적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훌륭하고 창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단계별로의 구체적인 실행방안과 정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내 삶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며 발전해 나아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이 나에게는 가치관의 혼란이었고 방황의 시작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제시하신 모델은 이 사회에서 모범적인 사람이 되는 것인데, 중고등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답답하긴 했어도 대학입시라는 목표를 두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그 안에서의 규율을 지키면서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전개된 상황은 단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나의 ‘자유’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어른들이 정해준 규율과 목표는 없었다. 알바나 과외를 하면서 돈벌이를 해도 되고,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시험도 잘보는 이른바 학점의 ‘에이스’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친구들과 놀러다니거나 미팅을 해도되고 여러가지 동아리 활동이나 대외활동을 해도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은 없었다. 그래서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중고생 시절때는 다른 학생들 하는 것처럼 학교갔다가 학원을 가거나 자율학습을 하면 됐지만, 이제는 무얼하든 상관없어졌기 때문이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게임만 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가까이에 있는 친구나 선후배라 할지라도 “자기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거니까, 지 인생이려니..” 하며 그저 지켜볼 뿐이다. ‘정답’과 ‘통제’에 익숙해져서 20년간을 살아오다가, 막상 성인이 되니 막막함이 앞섰다. 나를 제어하고 지탱해주는 ‘계율’같은 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출가의 길을 선택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상태로는 무엇하나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우니, 나는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곳을 찾으로 발길이 닿은 것 같다. 대학생이 되면서 주어진 갑작스러운 ‘자유’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관리하는 방법을 찾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출가사문이 되어서 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을 시작하니 마음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 졌다. 당장 해탈을 하고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길을 계속 가다보면 아무런 걸림이 없는 궁극의 대자유를 얻을수 있을것 같다는 희망이 생기게 되었다.
스무살이 되기 전 학교생활은 성실함을 익히고 규율을 엄수하는 수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무살이 된 후로부터는 사회인으로서 각자 나름대로 다양한 삶의 방식이 펼쳐지는데, 여기서 주의 해야 할점은 ‘자유’에 대한 관점이다. 내 마음대로 살면서 책임지지 않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없다. 내 하고 싶은 대로 놀고 먹고 자면서 좋은 직장, 좋은 사람과 인연되고 행복해 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책임지지 않는 것은 ‘방종’이다. 게다가 마음도 시시각각 변하고 산란하다. 날씨가 바뀌는 것 처럼 오늘의 마음과 내일의 마음이 다를 수 있고, 아침 마음과 저녁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그저 마음 흘러가는 대로 살아 가는 것을 ‘방황’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늘상 방황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계율’, ‘율법’ 내지는 ‘규율’, ‘행동강령’을 줄 수 있는 스승 또는 멘토를 찾아가거나 어떠한 공동체에 소속 되기를 바란다. 나는 승단 이라는 불교의 ‘수행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면서 계율을 받게되었는데, 그 계율을 지키려는 과정 속에서 사상 또는 가치관이 생기게 되었다. 이 세상을 사는 ‘지혜’는 어디로 튀고 흘러갈지 모르는 마음을 단도리 할 수 있는 ‘계율’으로 부터 시작하며 그래야 만이 어떠한 무언가에 ‘집중’을 해서 깊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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