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하스님의 카이스트 수행기] 스트레스로 인한 몸마음의 긴장감, 얼음 녹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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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호흡을 의식하면 이완이 되고 긴장감이 풀린다 [사진=석하스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걱정없이 맘편히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어쩌면 무언가 얻고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보다 내 근심 걱정이 사라진 상태, 번뇌를 소멸한 평온한 마음일 때가 아닐까?
이러한 희망과는 다르게 이 사회에서 경쟁이 과열되면서 부터 사람들은 더욱더 긴장하게 되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성과가 좋지않거나 학교에서 다른 학생보다 성적이 우수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도태와 탈락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의 학교생활에서도 이 경쟁원리는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나마 초등학생때는 성적에 그렇게 까지 목숨걸고 달려들지는 않았는데, 중고등학생이 되니 공부에 죽고 공부에 사는 학생들이 더러 생겼다. 대학교를 진학하니 그곳은 분위기가 더 살벌했다. 중고등학교때는 그래도 인간적인 정과 계산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선생님들과의 유대감도 힘든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만나는 동기와 선후배와의 관계는 그렇게 까지 돈독하거나 친밀하지 않았으며, 더치페이 문화가 말해주듯 이해관계를 바탕으로한 인간관계가 만연해 있었다.
대학생 시절,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사회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 해온다는 것을 느꼈다. 저들과 싸워 이겨야 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대명제를 깔아두고 치열한 전투의 현장으로 내모는것 같았다. 이러한 환경과 상황에서 어느누가 긴장감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일터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딜가나 맘편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잦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은 경직될 수 밖에 없었으며 마음은 마치 좁은 감옥 안에 들어가 있는 것 처럼 불편했다. 20대 초반 대학에서 이러한 삶이 되풀이 되면 될수록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공부를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연봉 많이 주는 직장을 왜 가야 하는지 그 의문은 더 커져만 갔다. 이미 정해진 답은 간단했다.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요소를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서양의 산업혁명 이후 대학은 산업 현장에서 쓸수 있는 기술들을 배울수 있는 직업전문학교였고, 그 형태가 동양으로 넘어와서 똑같이 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산업현장에서 쓸수 있는 기술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는 것이 우리 대학생들, 청년들의 동일한 목표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 나는 우물한 개구리이지 않았을까? 그 안에 있을 때는 잘 몰랐다.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채 주어진 목표에 따라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그시절... 성실하게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면 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출가를 해서 잠시 떨어져 나와 지켜보니 경쟁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안타깝고 나도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더 큰 범주에서 보면 나도 불가피하게 그 체제안에 들어가 있다. 그 사실이 애석하고 씁쓸하다.
글머리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스트레스, 긴장, 경직으로 부터의 해방이 바로 행복이다 라고... 내가 느낀 행복을 잠시 소개하자면, 나는 명상을 처음 배우고 그 맛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 느껴지는 그 라포감과 행복감을 더 진하고 깊고 더 길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 배운 명상은 은사스님에게서 배운 명상법이니 불교명상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전통 선도계열의 기수련에 가까운 수련법이었다. 스트레칭을 통해 몸을 풀고 두손을 마찰한 후에 마주본 두손을 좁혔다 넓혔다 하면서 기감을 느끼면 되는데, 차츰 그 기운에 젖어들고 머물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 그 수련법을 율려(律呂) 또는 흐름명상이라고 하는데 나에게 이 수련법이 잘 맞았다.
과학도로서 들어온 에너지가 없는 내 손이 저절로 흐르고 움직이는 것은 선뜻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들어오는 입력(Input)이 없는데 출력(Output)이 생기는 것은 무한동력 그 이상의 것이었다. 물리학 법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지만,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에너지의 스위치를 켜고 발전기에 전선과 코드를 연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수련을 하다보니 점차 긴장했던 마음과 경직되었던 몸은 이완되어 갔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대한 후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현재 지금 이순간 여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명상을 쉽게 느끼면서 배우게 되니 조금 더 어려운 불교명상도 대하기가 쉬워졌으며, 집중명상, 관찰명상 또는 화두선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인도명상과 초월명상 등 다른 명상법에 대해서 배척하기보다는 실용적이고 유익하면 배우는 쪽으로 바뀌었다.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중 앞에서 서는 것이 나에겐 참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두글자로 설명하자면, ‘얼음’ 이었다. 놀이에서도 ‘얼음’을 하면 ‘땡’하면서 녹아져야 하는데, 내 업장이 두터워서 그런건지, 살아가는 환경이 그래서 어쩔수 없었던 것이지.. 얼음으로 부터의 해방과 해탈이 쉽지 않았다. 또한, 어색하면 웃는 버릇이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한다. 나는 이 웃는 방어기제가 많았고,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다. 그런데, 이 명상을 통해서 그런한 욕심과 부담을 보고 느끼고 해결할 수 있었다. 단지, 그런 감정이 싫다고 외면하고 짜증내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것을 통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렇듯 명상을 통해 이완이 되니 삶에서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나를 오픈하고 다른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서면 얼음이 되었는데, 이제는 얼음이 되려고 하는 순간 그걸 녹이는 마음가짐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 얼음이 녹아 흐르는 듯, 저 존재와 내가 서로 소통할 수 있데 되었다. 나의 부족함과 열등감을 구태여 숨길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픈하고 상대방을 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았다.
이완은 행복의 출발인 것 같다. 아무리 금은보화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긴장되어 있으면 기쁘고 행복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어도 긴장감을 내려놓고 이완할 수만 있다면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긴다. 모두가 이완할 수 있는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행복의 문으로 진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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