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하스님의 카이스트 수행기] 참선과 호흡 (2)
<첨부사진: 2012년 가을, 보령 성주산 편백나무 숲에서 호흡명상 중..>
내가 수행하고 깨달은 참선법(參禪法)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적어본다. 참선(參禪)을 간단하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깨닫고 체험한 참선은 마음세계에서 일어나는 생명적 인식과 존재감이었다. 태중의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 받을 수 있고 별탈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 이처럼 우리들의 마음세계도 근원적 존재와 에너지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근원과 나 사이의 휘이고 꼬이고 비틀린 에너지의 통로를 파이프라고 생각해 보자. 공을 깨닫는 다는 것은 이 파이프의 입구인 동그라미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며, 참된 공속에 있는 묘한 무언가(진공묘유, 眞空妙有)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공급되어 들어오는 사랑, 자비와 같은 고차원적인 에너지를 맛보고 그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 대승경전의 정수인 〖반야심경 (般若心經)〗^(1))에는 조견 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이라는 법구가 나오는데, 그 뜻을 살펴보면, 색(色)이라는 물질작용과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마음작용을 비추어 보니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견(照見)은 ‘비추어 본다’ 라는 뜻인데, 비추어 주는 이 빛이 바로 근원(불성 또는 법성)에서 나오는 빛이다. 참선에 들어가기 전에 이러한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이론체계가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선수행을 한다고 오랜시간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더라도 깨달음과 수행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듯 교학(敎學)을 통해 마음세계에 대해 분명히 아는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교학에만 너무 치중해서도 안된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보여지는 형태나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또 하나의 알음알이를 만들어서 수행에 방해를 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음알이를 끊어야만이 깨침을 얻을 수 있다. 선가(禪家)에서는 〖교외별전(敎外別傳)〗^(2))과 〖불립문자(不立文字)〗^(3)) 라고 하여 깨달음은 문자에 있지 않고 마음과 마음사이에서 전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깨달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4)) 으로 전해진다는 가르침이다. 이심전심의 대표적인 예는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존자가 미소를 지었다’고 하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일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법상에 올라가시어 꽃을 들어 보였는데,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많은 제자들 가운데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읽고 파안미소 했다고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海里樂城)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이 있으니 이를 마하 가섭에게 부촉하노라”고 하셨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법통(法統)을 계승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선(禪)의 가르침이 직계제자를 통해서 전해지게 되었다.
위의 두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교학(敎學)이 바탕이 되어야 깊은 참선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학(禪學)을 닦아야 경전의 가르침이 생명력을 갖고 쓰일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불교계에서는 전통적으로 선이 교외별전의 것이고 교는 선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아 대립되어 왔는데,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그것을 회통하여 선교일치의 원칙을 정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이다. 따라서, 참선에 대한 가르침을 참고는 하되 실질적으로 참선수행을 통해 닦지 않으면 안된다. 실천은 하지도 않고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답을 내린다면 참선의 세계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머리의 의식은 끄고 가슴이나 배에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쉽게 얘기해서 참선은 가슴으로 닦고, 호흡은 아랫배에 의식을 두고 하는 것이다.
1)반야심경(般若心經): 불교경전. 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으로 완전한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그 뜻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이다.
2)교외별전(敎外別傳): 불교 선종에서 가르침을 전할 때, 부처님이 설한 경전이나 말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깊고 오묘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3)불립문자(不立文字): 종에서 법은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어나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데 참 뜻이 있다고 하는 것
4)이심전심(以心傳心): 말이 필요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뜻이 통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말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경론에도 의지하지 아니한 채, 곧바로 스승과 제자가 대면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는데, 이것을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언어와 문자를 여의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선승들이 법을 전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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